약국에서 일한 지 십 년이 넘었습니다. 남의 처방전은 하루에 백 장씩 보면서, 정작 제 것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더라고요. 올봄에 좀 심하게 지쳤어요. 주말에도 재고 정리하러 나가고, 밥 먹다가 발주 생각하고. 보다 못한 남편이 어느 날 저녁에 "달랏이라는 데가 있대" 하면서 예약 내역을 내밀었습니다. 베트남 달랏 3박4일, 숙소는 머큐어 달랏 리조트. 일정은 티그룹이라는 여행사에 통째로 맡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후기는 직업병처럼 써 보겠습니다. 처방전 형식으로요.

℞ 처방전 · 여행 전 소견

환자: 30대 후반 여성, 약사
증상: 만성 피로, 휴일에도 일 생각, 웃음 감소
처방: 달랏 3박4일 · 해발 1,500m 고원 공기 · 조식 포함
용법: 하루 한 번, 아무것도 안 하기

달랏 여행
체크인하자마자 이 그네 의자에 앉아서 십 분을 안 일어났습니다

1일차. 리엔크엉 공항에서 리조트까지 차로 40분쯤 걸립니다. 체크인이 오후 2시라 짐만 맡기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았는데, 7월인데 안 덥다는 게 제일 먼저 신기했어요. 고원이라 그렇답니다. 서울 열대야 뉴스를 보다가 와서 그런지 공기부터 약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녁 7시에는 달랏 야시장에 갔습니다. 시내까지 차로 금방이에요. 즉석에서 구워 주는 꼬치, 단 과일, 기념품 골목까지 정신없이 걸었네요. 여름이라 사람이 꽤 많았는데, 저희처럼 저녁 먹자마자 일찍 나가면 그나마 여유 있게 돌 수 있습니다. 길거리 음식 앞에서 남편이 "위장약 챙겨 왔지?" 하길래 약사 체면에 웃고 말았습니다.

달랏 여행
밤에는 로비 벽난로 앞이 명당입니다. 달랏 밤공기가 서늘해서 벽난로가 장식이 아니에요

2일차. 오전에는 사랑의 계곡이라는 테마공원에 갔습니다. 이름만 듣고 신혼여행 온 것도 아닌데 싶었는데, 막상 가 보니 호수랑 정원이 넓어서 산책 코스로 그만이었어요. 점심은 그 안에서 뷔페로 해결했습니다.

오후가 이 날의 하이라이트였는데, 랑비앙 고원입니다. 해발 1,950m 지점까지 지프를 타고 올라가요. 왕복 1인 10만동, 우리 돈으로 오천 원쯤이고 현금으로 내니 미리 바꿔 가면 편합니다. 지프가 생각보다 시원시원하게 달려서 저는 좋았고 허리는 놀랐습니다. 꼭대기는 바람이 제법 쌀쌀한데, 반팔만 고집하고 올라간 건 순전히 제 판단 착오였어요. 겉옷 하나 챙기시길.

내려와서는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람비엔 광장을 구경했습니다. 서울에서 먹던 맛 그대로라 남편이 국물까지 다 마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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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비앙 간판 앞. 사진 주인공 자리는 말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계곡에서 제일 오래 머문 곳은 호수 둘레길이었습니다. 물가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 앉아 있으니 약국 전화벨 소리가 처음으로 하나도 안 그리웠어요. 효능이 확실하길래, 부작용도 정리해 봤습니다.

℞ 복용 중 확인된 부작용

· 사진 촬영 과다 (3일간 400장, 개인차 있음)
· 반팔 고집으로 인한 재채기 1회 (본인 과실)
· 단톡방 확인 빈도 급감
· 귀국 후 달랏 항공권 시세 반복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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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계곡 호수. 이 정자에서 삼십 분을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3일차. 오전은 메린 커피 농장이었습니다. 커피콩을 수확해서 가공하고, 로스팅해서 한 잔으로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눈앞에서 보여 줘요. 약사라 그런지 원료에서 완제품 나오는 공정만 보면 직업병이 도져서, 가이드님께 질문을 제일 많이 한 사람이 저였을 겁니다. 원두도 두 봉지 사 왔어요.

농장 가는 길이 산길 커브라 빈속으로 나섰던 저는 살짝 어질했는데, 이건 아침을 든든히 안 먹고 나선 제 잘못입니다. 조식 꼭 챙겨 드세요. 조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리조트 레스토랑이 보라색 천장에 아치 창이 있는 공간이라 아침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인테리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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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랏은 골목마다 이런 카페입니다 (분위기 이미지)

오후에는 루미에르 라이트 전시관에 갔습니다. 빛의 숲, 거울방, 자이언트 볼 하우스 같은 디지털 아트 공간인데, 어른 둘이서 애들처럼 뛰어다녔어요. 남편이 라이트 페인팅 존에서 팔을 휘두르는 걸 찍어 줬는데, 이 나이에 이런 사진이 새로 생길 줄 몰랐네요. 사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기서 시간이 순삭됩니다.

마지막 날은 조식 먹고 체크아웃, 자유시간을 좀 보내다가 공항으로 갔습니다. 비행기 두 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해서 일정이 여유 있게 짜여 있더라고요. 끝까지 서두르는 느낌이 없던 게 이 여행의 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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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에르 전시관. 남편의 인생 프로필 사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 최종 처방전 · 정산
여행 경비 (1인)780만동대 ≈ 45만원대
기준4인 단독 · 시즌/환율 변동
포함픽업·가이드·입장료·3박+조식
불포함중·석식, 랑비앙 지프 10만동
재처방6개월 뒤 재방문 희망
★★★★☆

별 하나 뺀 건 리조트 탓이 아니라 나흘밖에 못 쉰 제 일정 탓입니다

돌아와서 약국 동료들한테 달랏 얘기를 얼마나 했는지, 이제 그만 좀 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음 처방도 티그룹에 부탁할 생각이에요. 카카오톡에서 @티그룹 검색하면 나오니, 저처럼 처방전만 쌓여 가는 분들은 달랏 한 번 다녀오세요. 고원 공기는 약국에서 못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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