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전시 도록
달랏 아트투어, 하루짜리 전시
관람 · 나와 미영이  |  장소 · 달랏  |  기간 · 딱 하루  |  작품 수 · 다섯

예약할 때 제일 걱정한 건 하나였다. 그림 못 그리는데 가도 되나. 나 미술 시간에 늘 뒤에서 두 번째였고 초등학교 이후로 붓을 잡아본 적이 없다. 근데 미영이가 “어차피 커피 마시고 사진 찍는 거겠지” 해서 그냥 결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둘 다 그림은 여전히 못 그린다. 그런데 이번 달랏 4박 중에 제일 오래 남은 게 이날이다. 전시 보고 나오면 도록 하나씩 사 오지 않나. 이 하루가 딱 그래서, 도록처럼 정리해 봤다.

첫 코스. 골목 들어서자마자 미영이가 “어” 하고 멈췄다.
작품 01
골목 하나가 통째로 그림
재료· 시멘트 벽, 페인트, 오토바이 소리
크기· 경사진 골목 전체
소장· 독냐랑에 사는 사람들

첫 코스가 독냐랑(Dốc Nhà Làng)이라는 벽화 골목이었다. 가이드님 말로는 원래 사람들이 그냥 질러 다니던 지름길이었는데, 이 동네 예술 프로젝트가 들어오면서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응모작이 250점쯤 됐다고 들은 것 같은데 숫자는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그림 주제가 재밌었다. 달랏을 처음 찾아냈다는 의사 이야기, 고원에 피는 꽃, 창문에 걸어놓은 화분, 스웨터 입고 학교 가는 여자애들. 관광지용으로 예쁘게 뽑은 그림이 아니라 이 동네 얘기라서 좋았다. 사진보다 실제가 낫다. 골목이 좁고 경사져서 그림이 한 번에 안 보이고, 걸으면서 하나씩 나온다.

아쉬운 것도 있다. 여기 사람 진짜 사는 집이다. 빨래 널려 있고 아저씨가 오토바이 끌고 나오는데 우리가 길 막고 사진 찍고 있는 거다. 좀 미안했다. 우리는 짧게 찍고 비켜드렸는데 뒤에 온 팀은 삼각대까지 폈더라. 그러진 말자 우리.

벽화는 지금도 계속 그려지고 손본다고 한다. 마침 작업 중인 걸 봤다.
작품 02
생각보다 조용한 방
재료· 흰 벽, 이젤, 큰 창문
크기· 아담함. 상상한 것의 절반
소장· 포 벤 도이 갤러리

다음이 포 벤 도이(Phố Bên Đồi) 갤러리. 이름은 “언덕 옆 거리” 뭐 그런 뜻이라고 했다. 나는 하얗고 거대한 미술관을 상상했는데 전혀 아니다. 아담하고, 창이 크고, 창밖이 그냥 나무다. 사진 작품이랑 그림이 벽에 걸려 있고 이젤에도 몇 점 세워져 있다.

설명 들으면서 이십 분인가 삼십 분 있었다. 미영이는 사진 한 장 앞에서 한참 서 있었고, 나는 솔직히 반은 이해 못 했다. 근데 이해 못 해도 아무 일 안 일어난다. 여기가 공연도 하는 공간이라고 하던데 — 피아노랑 실내악도 한다고 — 우리 간 날은 공연이 없었다. 그건 좀 아쉬웠다. 있는 날 가면 더 좋을 듯.

에어컨 없고 창문 열어둔다. 달랏이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작품 03
무제 (소나무라고 우기는 중)
재료· 캔버스, 아크릴, 근거 없는 자신감
크기· A4보다 조금 큼
소장· 우리 집 신발장 위

그리고 야외로 나가서 워크숍. 도구는 다 준다. 이게 포함이라 따로 산 게 하나도 없다. 주제 주고 그리라는데 나는 소나무를 그렸다. 미영이가 브로콜리냐고 물었다. 옆 커플은 진짜 잘 그려서 좀 얄미웠다.

강사분이 내 것도 진지하게 봐주고 붓 쥐는 법을 고쳐줬는데 그때 좀 뭉클했다. 사십 넘어서 누가 내 그림을 봐주는 일이 없지 않나. 못 그려도 아무도 뭐라 안 한다. 이게 이 투어의 전부인 것 같다.

솔직한 아쉬움 둘. 하나, 조인 투어라 처음 보는 사람 열 명 남짓이랑 하루를 같이 다닌다. 나는 낯가려서 앞 한 시간은 어색했다. 다 같이 못 그리다 보니 나중엔 풀리긴 했다. 둘, 오후에 비가 잠깐 왔다. 7월 달랏은 그럴 수 있다고 미리 들어서 우산은 챙겨갔다. 챙겨 가세요.

다들 진지하다. 이 중에 잘 그리는 사람은 세 명 정도였다.
작품 04
밥 (포함)
재료· 쌀, 국물, 연유 커피
크기· 한 상
소장· 내 위장

중식이랑 석식, 중간 간식이 다 포함이다. 이게 은근 크다. 하루 종일 밖에 있는데 “이제 뭐 먹지”를 한 번도 안 물어봤다. 우리끼리 다녔으면 분명 검색하다 시간 다 보냈을 거다.

커피는 따로 말해야겠다. 달랏 커피는 진짜다. 나 한국에선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사람인데 여기서 연유 커피 마시고 하루에 두 잔씩 마셨다. 개인 경비는 따로인데 나는 엽서랑 작은 그림 하나 사서 이십만 동쯤 썼다. 그 정도가 딱 기분 좋았다.

달랏 커피 (이 사진은 다른 날 다른 카페인데, 분위기는 딱 이랬다)
작품 05
소나무 사이에서 듣는 라이브
재료· 기타, 스피커, 밤공기
크기· 언덕 하나
소장· 마이랑탕

마지막이 마이랑탕(Mây Lang Thang) 공연이었다. 티켓이 포함이라 그냥 들어갔다. 언덕 위에 있고 딘 1 근처라고 했다. 야외 무대인데 뒤가 그냥 소나무 숲이다. 해 질 때쯤 시작한다.

베트남에서 유명한 가수들도 종종 온다는데 우리 날은 내가 모르는 분이었다. 알아도 모르긴 했을 거다. 노래 가사 하나도 못 알아듣는데 옆에 앉은 베트남 애들은 다 따라 부르고, 나는 그냥 앉아서 나무만 봤다. 이상하게 그 이십 분이 이번 여행에서 제일 좋았다.

경고 하나. 밤에 춥다. 진짜 춥다. 달랏 밤이 십오륙 도인데 언덕이라 바람까지 분다. 나는 얇은 가디건만 입고 갔다가 미영이 무릎담요를 뺏어 덮었다. 겉옷 꼭 챙기세요. 공연은 주로 금요일에서 일요일 사이에 한다고 들었으니 날짜 짤 때 참고하시고.

뒤가 무대 배경이 아니라 그냥 진짜 숲이다.
관람 후기 · 마지막 장
그림 실력 향상 0점, 하루 만족도 ★★★★ 중 넷 반
깎은 이유· 조인 투어라 사람이 좀 많은 것, 우리 날 갤러리에 공연이 없던 것
지상비· 1인 십만 원이 채 안 됐다 (개인 경비 별도)
준비물· 우산, 겉옷, 못 그려도 된다는 마음

달랏에서 하루를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싶었는데, 케이블카 타고 사진 찍고 온 날보다 이날이 더 남았다. 미영이는 아직도 자기 그림을 카톡 프로필로 해놨다.

우리는 달랏 일정을 티그룹으로 통으로 짰는데, 아트투어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담당자분이 “그림 안 그려도 되는 투어”라고 해서 넣은 건데 그 말이 맞았다. 혹시 달랏에서 하루가 붕 뜬다면 티그룹에 아트투어 있냐고 물어보고, 그림 못 그린다고 미리 말해두시면 된다. 어차피 나보다 못 그리긴 어렵다.

— 현지. 도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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